[칼럼-기독교 역사 산책2]예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

예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

교육부



구약의 메시야 사상과 시온이즘에 빠진 유대인들은 그들이 기다린 구세주, 즉 왕으로 오신 예수와 그 복음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시작된 기독교운동은 예수가 남겨놓은 12명의 제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로 인하여 초기 교회의 형태를 띠게 된다. 예수는 승천하면서 다시 올 것을 약속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운동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 초기 교회 공동체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에 믿음의 근거를 두고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자로 곧 돌아오실 것을 선포하고 그 사건을 기대하며 살았던 팔레스타인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가난한 자’, ‘성도’라고 지칭했고, 그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 즉 ‘모임’ 혹은 ‘교회’라고 불렀다. 이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참된 ‘모임’ 즉 주께서 영광중에 오실 때 시인하실 종말의 공동체로 보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인식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성전예식에 열심을 내었고, 율법을 지키는데 충실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예루살렘 종교 당국과 평화를 유지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자신들만의 특별한 정체성을 표현하는 나름대로의 특별한 제도를 갖고 있었다. 이 공동체는 성령의 종말론적 은사와 관련된 세례를 베풀었다. 또한 기도하며 서로 권면하고 ‘떡을 떼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모였다. 역사가들은 이 떡을 떼기에서 공동체의 교제를 위한 식사뿐만 아니라 성찬식이 생겨났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세운 구성원은 예수가 이 땅에 남겨놓은 12명의 제자(사도행전을 보면 맛디아를 뽑아서 다시 열둘이 되었다)였던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생겨난 예루살렘 공동체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 빠지는 것이 원인이 되었다. 이 문제는 공동체의 공동 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일곱 명의 헬라파 사람들을 임명함으로써 해결되었고, 이것이 후일 최초로 일곱 사람의 집사가 된다. 하지만 이런 갈등의 양상은 헬라파의 지도자인 스데반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다른 회당 구성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더 나아가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사람으로 고소당하게 된다. 결국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게 된다. 이것은 교회사에 드러난 첫 번째 핍박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또다른 공동체인 헬라파 공동체는 그들이 가진 다소 급진적인 열심으로 인해 핍박의 선두에 서게 된다. 이제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먼저 디아스포라들에게 전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들은 전통신앙의 관행을 깨뜨리며 이방인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교제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다. 이 공동체의 선두에 순교한 스데반과 바울이 있다.

이제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바울과 헬라파 기독교인들은 안디옥을 중심으로 새로운 전도의 불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에 반해 전통을 잘 고수하며 평화롭게 지내던 예루살렘 공동체도 헤롯 아그립바 1세(41-44 A. D.)의 치하에 들어서자 핍박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아그립바는 집권 후 전통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핍박하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다. 이런 핍박이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지역을 선교하는 사도로서의 활동을 하게 만들었고, 예루살렘 공동체는 주의 형제 야고보에 의해 주도 된다. 그리고 그 야고보마저 63년경에 순교하고 만다. 초기 교회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 기독교 공동체는 일종의 모임이었으며 그들 안에 헬라파공동체와 전통 예루살렘 공동체가 다소 다른 성격으로 유대교 안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이 공동체는 유대교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고, 이런 과정 속에서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순교를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