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예수]씨뿌린 자의 거두는 기쁨

씨뿌린 자의 거두는 기쁨

김 원 희 집사 (7교구)



나는 전북 남원에 속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서 살았다. 마을에는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할머니 따라 절에는 가봤어도 교회에는 갈 생각을 안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때였던 것 같다. 서울에서 전학 온 친구가 나에게 교회 가자고 하였다. 그때 그 친구가 참 착해보였기에 그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다. 빵과 사탕을 준다는 말에 호기심도 생겼다. 출석을 잘하면 상도 준다는 말에 무작정 열심히 다녔다. 전도사님께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면 그게 그렇게 재밌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고 있기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과 그러기 위해서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늘 기억하며 살고자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교회학교 생활을 통해 인성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가 배가 아프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다. 정신을 차리고 집에 가서 이야기를 했더니, 부모님 표정은 별로 놀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후에도 자꾸만 배가 아팠다. 시내에 있는 내과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일 후에 부모님은 나를 거짓말쟁이처럼 보시며 무시를 하였다. 너무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이후에도 종종 배가 아플 때면 혼자 구석에서 끙끙 거리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그런 내가 하소연할 곳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었다. 은밀한 중에 들으신다는 말씀이 기억나서 다락방에 들어가 울면서 기도한 적도 있었다.

어느 주일에 전도사님께서 어김없이 말씀을 전하시는데, 새벽에 나와 열심히 기도하면 소원을 이뤄주신다는 말씀이 귀에 들어왔다. 당시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새벽예배를 드리면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다음 날부터 새벽예배를 드리기로 결심했다. 어린 나이에 새벽예배는 무서웠다. 불빛도 많이 없던 시골길을 혼자서 걷는다는 것은 여간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나의 간절한 이 마음을 아시겠지 하며 열심히 다녔다. 이유모를 병이 낫기를 바라며 새벽예배를 다니는 것을 지켜본 전도사님께서 기도원을 한 번 가보라고 권유하였다.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시작하였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마음 가운데 “딸아 걱정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너무나 또렷하여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져 주실 거라는 확신을 갖고 기도원을 내려왔다.

그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다. 부흥강사님께서 전도사님 소원기도가 교회에 의자를 해놓는 것이라며 혹시 하실 분이 있으면 손을 들라고 하셨다. 그때 마음 가운데 이건 내가 해야 한다는 마음의 확신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놀랐다. 아마 어린아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의자를 한다고 손을 들었는지 생각하셨을 것이다. 부흥회를 마치고 집으로 와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왜 그랬지? 돈을 어떻게 만들지? 중학생이었던 나는 너무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때였다. 내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시집 갈 때 아무것도 안 해 가더라도 교회 의자는 꼭 해놔야겠다는 것이었다. 바로 부모님을 찾아가 낮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 드렸다. 역시나 아버지는 엄청 화를 내셨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교회 의자를 해 놓으면 내 병이 나을 것이라며 아버지에게 매달려 계속 부탁을 드렸다. 나에게 화를 냈던 아버지는 그 다음날 전도사님을 찾아가 의자를 해놓겠다고 하셨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교회 어르신들께서 같이 하자해서 그 후 차가운 마루가 아닌 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다. 이 일을 통해 아버지를 볼 때면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부흥강사님께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시고 나에게 네 아버지는 장로님이 될 분이라며, 빨리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하셨다.

그 일이 있고난 후에도 난 가끔씩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학교 친구들은 날 이상하게 봤고, 점심시간이면 병이 전염될지도 모른다며 날 멀리하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언제나 혼자 밥을 먹어야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증상으로 인해 학교생활은 나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학교도 가기 싫었다.

집 앞에 흐르던 섬진강 강둑에 앉아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이렇게 지내야 하는 내 상황이 속상하여 몇 번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때면 멀리 보이던 교회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성경에 자살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라는 생각에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지옥에 비하면 이런 모습일지라도 이 세상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견디고 또 견뎠다.

 마음 가운데 음성도 들었고, 교회 의자도 헌물 했는데 몸은 전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성경말씀에 때가 되면 이루리라 했는데, 그 때가 언제일까 답답했다. 전에 부흥강사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네 아버지는 장로님이 될 분이야.’ 이제 남은 건 아버지를 교회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도를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할머니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병원을 가셨는데, 폐암 말기라는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받았다.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가족을 불러 모으셨다. 그 때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몇 가지 유언을 하셨다. ‘내가 죽으면 믿는 식으로 해라’, ‘너도 교회 다녀라’, ‘죽어서 천국에서 만나자’ 등의 얘기를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할머니의 유언대로 교회장을 치르고, 아버지도 교회에 나오셨다. 하지만 난 여전히 아팠다. 아버지가 교회에 나오면 병이 나을 줄 알았는데, 너무 속상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랬다.

 그 당시 언니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내 이야기를 들은 형부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예약을 해주어 진찰을 받았다. 뇌 사진을 찍어보니 혈액에 이물질이 있어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뇌수술은 발달 초기 단계여서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고,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며 겁을 주었다. 그 말을 듣던 아버지는 안한다고 하셨고, 난 하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전 나에게 들려주셨던 그 음성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술비용이었다. 천만 원이라는 금액을 듣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형부가 자신이 수술비를 내겠다고 하였다. 그 큰돈을 선뜻 내겠다는 형부에게 너무 고마웠다. 그렇게 하여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고, 수술결과 혈액에 맺혀있던 이물질은 간디스토마라는 기생충이었다. 그 후 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건강을 되찾고 나니 주변에서 선자리가 많이 들어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교회의자를 해주신 것으로 인해 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혼자금이 들어가지 않는 배우자가 필요했다. 당시 외갓집 언니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분은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으나 얘기를 나누면서 사람이 참 성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혼수는 필요 없다는 말에 주님께서 내게 보내준 짝이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기울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수술과 혼수가 필요 없다는 배우자까지, 아버지께서 교회를 다니고 나서 이 모든 막혀있던 문제들이 하나씩 풀렸다. 아버지도 지금은 장로님이 되셨다.

 큰 목사님께서 “씨를 뿌려라! 그럼 거두리라.” 는 그 말씀이 내 삶을 뒤돌아보니 너무나 딱 맞는 것 같았다. 어릴 때 뿌린 씨를 통해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 가운데 모든 걸 예비하고 계셨다.

 혹시 내가 겪었던 상황과 비슷한 경험을 통해 마음 가운데 시험에 빠진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하나님 앞에 더욱 기도하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