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통로인 임마누엘교회
이 계 춘 집사 (11교구)
할렐루야!
부족하니만 저의 삶을 통해 경험한 은혜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며, 김정국 담임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작년에도 간증을 하라는 교구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올해는 안되니 다음 해에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1년이면 교구 목사님이 다른 분으로 바뀌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어느덧 일년이 지나 이렇게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고를 정리하면서 그 동안 임마누엘교회와 함께 했던 일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며 저 스스로에게 대견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임마누엘교회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지금부터 28년 전인 초등학교 6학년때 방이동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였습니다. 그 때는 교회 이름도 강남제일교회였고 위치도 송파구청 건너편이었습니다. 당시 부모님께서 함께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기 때문에 소속감 없이 주일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평범한 학생으로 지냈습니다. 그래도 그때부터 임마누엘교회가 이곳 새로운 성전으로 이사하는 과정을 제 눈으로 보면서 직접 천 백배의 축복을 함께 볼 수 있었던 것이 정말 감사한 것 같습니다.
그러던 저에게도 임마누엘의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기적처럼 찾아왔습니다. 정말 존재감 없이 교회를 다니던 저에게 어느 날 고등부 가브리엘찬양대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이 기회가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찬양대 참여를 통해 찬양의 기쁨을 맛보게 된 저는 그 때부터 매주 드리는 찬양을 통해 믿음이 성장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고3때도 그 끝없는 기쁨을 찾아 매주 빠지지 않고 찬양대 활동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공부와 학업으로 지쳐있을 바로 그때에 이 성전에서 성령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봄철 부흥회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오셨던 목사님의 설교에 끊임없이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성경책이 흠뻑 젖어 찢어져버려 그 성경책은 이후에 제 믿음의 증표가 되었습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고3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에서 보냈던 것 같습니다. 가끔씩 집에는 도서관에 간다는 하얀 거짓말을 하고 교회에 올 정도로 저에게 교회는 큰 의미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인 저는 전기 입시에 불합격하게 되었고, 좌절로 인해 입학을 포기하고 재수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기대하지도 않았던 후기 입시에 합격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전기에 비해 후기는 선택할 대학교도 많지 않고 그만큼 더 치열하기 때문에 합격이 어렵습니다. 저는 제가 후기에 합격하게 된 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저의 대학교 생활은 온통 교회활동 중심이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때부터 초등부 교사를 시작해 10년간 교사로 봉사했고 당시 대학부에서 찬양인도, 친교부장 등을 맡으며 즐거운 교회활동을 보냈습니다. 정말 많은 추억이 있습니다. 여름방학마다 아동부 수련회 준비를 위해 매일 교회에서 선후배들과 준비했던 일, 500명이 넘는 전체 아동부 아이들 앞에서 찬양인도를 했던 일, 대학부 수련회를 가서 친구들과 부등켜 안고 서로를 위해 기도했던 일, 드라마예배 때 뮤지컬 지저스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유다역을 맡아 무대 위를 누볐던 일, 에벤에셀찬양대에서 선교여행으로 인도네시아, 싱가폴, 말레이시아를 갔던 일 등.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은 주님을 만난 경험입니다. 대학부 수련회였습니다. 당시 저는 취업난과 가정 형편, 미래에 대한 불확실로 앞이 보이지 않아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 때 참석한 수련회에서 저는 주님께 저를 만나달라는 한가지 제목으로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아직도 기억합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기도하던 저에게 주님은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세상보다도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 사랑합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아들아 내가 이미 너에게 세상을 이길 모든 능력을 주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라.” 이 말씀은 지금도 저의 모든 삶의 기준이고 힘이 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때 보냈던 교회생활 모두가 소중한 추억입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 때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이 가장 친한 친구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맺어진 인간관계는 세상의 그 어떤 만남보다도 강하고 오래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그 만남이 이어져 지금 오랜 친구이자 저의 배우자인 최수진 집사를 만나게 되는 축복도 받았습니다. 저희는 중학교 때부터 임마누엘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사이였는데 주님께서 준비하신 배우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주님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한가지 기쁨이 있으면 안타까움이 있다고 했나요? 신혼이 끝날 무렵 저희 가정은 경제적인 문제로 송파와는 멀리 구로구로 이사하게 되었고 몸이 멀어지게 되자 교회와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주님은 저희 가정을 위해 새로운 교회를 예비해 주셨고 목동 지구촌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도 주님의 축복은 이어져 십일조 생활을 하게 하셨고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십일조를 통한 개인적인 경험을 간증하고자 합니다. 사실 생활이 빠듯하다는 이유로 부끄럽지만 그 동안 십일조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단과 함께 처음 십일조를 드린 그 달에 은혜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처럼 주유소에서 주유한 후 경품 쌀에 당첨되고, 각종 식당의 무료 식사 쿠폰이 쏟아지듯 날아오고, 심지어 케이크, 빵, 음료 무료 쿠폰까지 받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달에 십일조 드렸던 금액의 상당 분이 다른 방법으로 채워지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저희 가족을 향한 주님의 축복은 이어져 첫째 아이 예성이와 둘째 은성이를 주셨고 그 기간 동안 아이들과 함께 신앙이 더욱 성장하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가야 하는 나이가 되자 저희 부부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당시 집 근처에 초등학교가 없어서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저희는 능력이 되는대로 목동 언저리로 이사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 때 공교육의 문제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목동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교육열과 학구열이 뜨거운 동네라서 더욱 그랬습니다. 어린 나이에 만들어지는 배타적인 학원/과외 그룹, 1등을 위해서는 물불안가리는 필요 이상의 경쟁심, 시기, 질투 등. 알면 알수록 한숨만 나오는 공교육의 현실은 다른 대안을 찾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 찾아온 것이 전인기독학교입니다. 저희 부부가 이곳에 몸담고 있을 때 전인기독학교가 만들어졌기에 처음 진통과 시행착오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 백배의 축복을 받은 임마누엘 제단이라면,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선택한 학교라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전인기독학교에 저희 아이를 맡겨야겠다고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약 7년 만에 돌아온 임마누엘 제단은 정말 많은 것이 변해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와 학창시절 함께 활동했던 김정국 목사님께서 담임 목사님으로 훌륭하게 전통을 이어가고 계시고 제가 학생 때 저의 선생님이셨던 분들이 장로님, 권사님으로 든든하게 이 제단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물론 그 당시 저와 함께 활동했던 많은 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안 계시는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하지만 임마누엘 제단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계속되기에 더 좋은 분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모습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제는 저에게 이어진 임마누엘의 축복이 임마누엘 모든 성도님과 우리 자녀들에게 넘쳐나도록 만드는데 작은 밑거름이 되고자, 올 한해 저는 유치부 교사로서 최수진 집사는 11여선교회 회장으로서 섬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이야기를 마치려 합니다.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임마누엘 제단이 얼마나 축복이 넘치는 곳인지.
예전엔 정말 몰랐습니다. 전인기독학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압니다.
임마누엘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축복에 대한 계획이 상상도 못할 만큼 크시다는 것을!
임마누엘 천 백배의 축복이 모든 성도님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