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특징-무절제 – 설교 : 김 정국목사
디모데후서 3:1~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요즘 프로야구 인기가 한창입니다. ‘류현진 선수가 미국으로 진출이후에 2년째 들어서는 해인데…. 잘해야 할텐데’하고 이야기를 하면 우리 아이들은 아빠가 왜 그 걱정을 하고 있냐고 물어봅니다. 올해 프로야구 선수들 중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좀 더 사랑을 베풀고 경쟁자들 가운데도 두각을 나타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사회인 야구팀이 있습니다. 작년에는 연신 지기만 했는데 올해는 벌써 승리의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제가 야구팀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모임에 갔는데 저에게 2루수에 들어가서 수비를 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제가 흥분을 했겠습니까? 타자가 친 땅볼 타구가 저에게 날아왔습니다. 저는 분명히 왼손에 낀 글러브로 물 흐르듯이 공을 잡고 1루 베이스로 송구를 쫙~ 끝.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이 갑자기 날아오니까 왼손에 낀 글러브는 생각을 못하고 오른손 맨손으로 공을 꽉 움켜쥐었습니다. 그 세게 날아오는 공을 맨손으로 그리고 1루로 던진다는 것을 2루로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1루에서 2루로 가는 선행주자를 아웃시켰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다시는 우리 교회 야구팀 경기에 가지 못할 뻔 했습니다. 창피해서…
글러브를 낀 왼손으로 잡아야 하는 것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급하니까 바로, 오른손이 나가더라구요.
절제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무수히 연습을 하지 않으면 실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제를 무수히 연습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이나 세상의 사람들이나 똑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21세기에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무절제의 습관들입니다.
예전에 우리들의 가장 큰 덕목으로 인내하고 절제하는 일을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무절제가 얼마나 성행하는지 모릅니다. 무절제가 마치 멋있는 문화인양 절제하지 못하는 생활들을 하고 있습니다.
굳이 우리가 참아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굳이 우리가 낮추어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굳이 우리가 스스로를 얽어 매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시 절제가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절제의 목적은 경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제해야하는 이유는 경건해지기위해서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원래는 세상에 썩어져서 살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라는 약속을 주셔서 그 신성한 성품을 닮아 가는데 우리 삶의 목적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쓴 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이자 양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목회자적인 관점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울의 ‘사랑하는 디모데’라는 것은 디모데후서에 마지막 부분에 디모데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바른 교리를 가르치고 믿음 생활을 격려하기 위해서 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목회를 함에 있어서 디모데야, 네가 조심해야 할 말세의 특징들이 있단다.
1. 자기를 사랑하며,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2. 돈을 사랑하며. 머니머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지요. 머니money를 위해서는 친구도 가족도 없습니다. 평생 함께 살아온 부인을 저 세상에 보낼 수도 있는 것이 머니money입니다.
3. 자랑하며, 허세부리기 좋아하고
4. 교만하며, 남들 위에 앉고 싶은 욕망이 넘쳐나며
5. 비방하며, 교묘하게 넘어뜨리고, 상처를 주며
6. 부모를 거역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부모를 거스르며
7.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과 손을 잡기를 부인하고
8. 거룩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가는 것을 부인하며
9. 무정하며, 사랑이 없고
10. 원통함을 풀지 않으며, 늘 서운하고 늘 상처받고
11. 모함하고. 왕따 시키고
12. 절제하지 못하며
13. 사나우며 난폭하고 잔인하고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쿨Cool한 것을 좋아하죠
15. 배신하며 발뒤꿈치를 들고
16. 조급하며
17. 자만하며
18.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외식하는 자를 말합니다. 겉보기에는, 외형상은 거룩하나 진정으로 경건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인 것은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벗어나라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당부하고 있지만, 바울이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말세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중에도 우리는 ‘절제’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절제라는 단어는 한자로 節制, 즉 ‘마디를 자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더 이상 수위가 넘어가지 않도록 잘라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절제’라는 것은 스스로 지키기가 힘든 것입니다. 남들이 시키는 것은 절제라는 표현에 안 어울립니다. 남자들이 군대에 가면 절제된 생활가운데 산다고 말하는데 군대 가면 절제되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강제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북한사람들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그 고난들이 절제가 아니라 강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마디를 잘라야하는데 누군가가 나의 마디를 잘라주는 것이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25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절제하는 사람들은 영광을 누리게 되어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상을 얻기 위하여 달려갑니다. 그런데 영광을 누릴 사람은 모든 경쟁자들 가운데도 한명 뿐이라고 합니다. 최고의 한 명이 가장 큰 영광을 누리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 상을 얻기 위해서 달려간답니다. 그런데 그 노력에도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절제한다는 것입니다. 이기기 위해서 끊임없이 절제하고 또 절제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의 마디를 끊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절제는 사람들이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절제하는 능력을 소유한 것 같지만 진정한 절제는 성령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고 있는 절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절제가 아니라 외식입니다. 절제에는 반드시 뒤에 따라오는 덕목이 있는데 그것은 경건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은 절제하는 척, 인내하는 척, 착한 척을 하고 있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건의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건의 모습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은 없다. 진정한 절제가 없기 때문에 경건한 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무절제의 모습들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지금 21세기를 빗대어서 포스트모던 사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포스트모던 문화를 한마디로 ‘갈 때가지 간 문화’라고 말한다면 포스트모던 사회란 일탈의 문화, 균형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질서와 법칙에서 벗어나는 사회를 말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이기적인 특성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일상에서도 예전에 나타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창의적이고 자유스럽다는 것은 책임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책임이 없는 자유와 창의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21세기 무절제의 문화는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소통하라고 만들어 주신 언어들은 요즈음 용도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은어들은 그렇다치고 중·고등 학생들의 입에서, 아니 심지어는 초등학생들의 입에서 상상하지 못할 언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정말 이래도 되는건가 할 정도로 더러운 벌레들이 우리 아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협하고, 누군가를 모함하고, 누군가의 영혼을 죽이려는 의도의 언어들로써 우리아이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술에서 어떻게 건전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만들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 아이들이 대한민국의 미래의 역군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이 아이들은 누구를 보고 자랐습니까? 누가 이 아이들이 이런 언어를 쓰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만들어 놓았습니까? 우리들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쓰는 언어 한마디로 그 사람의 인격을 가늠할 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21세기 무절제의 문화는 「분냄」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번을 일흔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분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 자랑인양, 남들보다 잔인한 것이 잘한 일인양, 무자비하고 사나운 것이 자랑인양, 남을 폭력적으로 이기는 것이 자랑인양, 잔인하게 복수하고 다시는 나에게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미덕인양, 이 세상은 분을 내는 것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해가지기 전에 분을 풀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그것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인가 봅니다. 여러분들 자녀들이 실수했을 때 손을 들고 때리는 시늉을 하실 때가 있으시지요? 그러면 자녀들은 맞는 시늉이나 피하는 시늉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때리지 않으셨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경험을 겪은 자녀들은 통계상, 이미 맞은 걸로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미 우리의 손이 올라갔을 때 때리건 때리지 않았건 자녀들의 가슴 속에는 맞은 기억으로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분냄은 우리들이 여지껏 열심히 쌓아온 경건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21세기 무절제의 문화는 「집착」입니다.
요즈음은 공공연하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연속극들이나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세상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연속극의 주제를 보면 말도 안 되는 주제들과 성경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궁금해서 TV를 켭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도 보다 보니까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처럼 우리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버렸습니다.
집착 속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있습니다. 어떤 단어가 있을까요? 스마트 폰, 일, 홈쇼핑, 스포츠, 인터넷. 전 국민을 겸손하게 만든 매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스마트폰입니다. 그 스마트폰에 고개를 떨구고 사는 세상입니다. 홈쇼핑, 자다가도 택배왔다는 소리는 문을 열어주면서도 반갑습니다. 스포츠, 밤을 새면서 보고 몸으로 뛰고. 헬스장에 가면 70대 할아버지가 역기를 얼마나 많이 하시는지 아십니까? ‘난 이게 낙樂이야’라고 하시면서 그 무거운 걸 백개씩 들어 올리세요. 골프, 주일예배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자랑처럼 말합니다. 인터넷, 없으면 숨도 크게 못 쉬어요, 게임도 해야 하고 검색도 해야 하고 말입니다. 어느덧 이러한 편리하고 즐거운 것들이 우리를 묶는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시편 119편 9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옳은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만 성경은 말씀으로만 우리의 행실을 지킬 수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행실을 정결케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의 행실을 정결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말씀으로만, 말씀으로만, 말씀으로만이 우리의 행실을 지킬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이 오리엔테이션이하 O.T 간다고 따라가서 주일도 빼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학교 문화라구요? O.T 안가고도 대학생활 잘 할 수 있습니다. O.T 가서 뭐하냐고요? 이건 뭐 술파티지요. 정신없이 마시고 한 방안에서 드러누워 자는 겁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방바닥에 토하고 또 쓰러져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서로 서먹해하며 ‘이렇게 한번 마셔야 친구가 된다’고 서로 위로를 해주곤 한답니다. ‘우리 애들은 안 그렇겠지’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O.T가 그렇습니다. 99.9%입니다,
대학교 축제가 뭡니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먹고 운동장에 드러누워 자는게 요즘 대학교 축제입니다. 잘하면 남자친구, 여자 친구를 세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 학교 축제입니다.
자녀들에게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육신적인 쾌락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오토바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도 오토바이 위에 앉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스피드가 주는 뇌의 자극이 크다는 것입니다. 마약을 하는 사람도 마약을 끊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고 합니다. 마약이 뇌에 주는 영향Damage이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박도 마찬가지입니다. 손가락을 자르고 손목을 잘라도 다시 도박테이블에 앉는다고 합니다. 포르노그라피도 똑같습니다.
집착하고 있는 뇌들의 구조는 거의 비슷하다고 합니다. 술도 그렇고 담배도 그렇고, 성폭력 범죄도 그렇고, 우리도 모르는 새 스마트폰이, 명품가방이, 연속극이, 스포츠가 우리를 정신없이 집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으로부터 계속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섭리를 파괴하는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참지 못하고, 이겨 낼 의지가 적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오늘도 또 똑같은 중독에 빠져버리는 우리들의 뇌구조는, 아무리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간에 이 중독의 구조에서 벗어날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이 모든 것을 끊고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1세기 무절제의 문화는 「이혼」입니다.
남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덕목은 절제입니다. 아내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덕목 또한 절제입니다.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는 모든 남자들은 남편으로써 절제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헤어지는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일입니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하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을 하고, 나의 마디를 잘라야하는데, 남의 마디를 자르려고 합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예방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의 부부들이 그렇게 쉽게 이혼을 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21세기 무절제의 문화는 ‘자살’입니다.
자살은 생명의 주권이 여호와께 있음을 잊어버린 행동입니다. 생명만 끊으면 될 것 같은 유혹들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살이 어느덧 문화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루에 40명씩 자살하는 나라로써 인구 단위상 가장 많이, 생명을 끊는 나라라는 겁니다. 언제부턴가 자살이 미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이렇게 살 바에는 목숨을 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누가 힘들어서 그렇게 하는 것을 모른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은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없이 살아도, 인생에 아무리 얼룩이 져 있어도 우리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쌀이 없어서 못살겠다면, 쌀은 얼마든지 제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은 끝까지 붙잡고 가야합니다.
울컥하는 마음에 술 먹고 욱해서 뛰어내리고, 술먹고 목을 메고, 술먹고 저지르는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연예인들은 자살해도 되는 것마냥, 유명인들이, 경제인들이 정치인들은 자살을 해도 되는 것마냥 자살을 미화시켜 놓았습니다. 그들은 영웅이 아닙니다.
자살의 유혹을 절제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살고 싶지 않은 때가 있습니다. 평안해 보이는 사람도 그러한 고통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우리 주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당신의 목숨을 건져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만 바라보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교회의 교우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생명의 불씨를 키워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은 고민을 많이 하게끔 되어있습니다. 시기적으로도 분명히 말세가 가까워 왔음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에 하지 말라는 일들은 계속되고, 말세의 증조들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언어. 분냄. 집착. 이혼. 자살》이외에도 많은 고민들이 있겠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우리가 절제를 연습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에는 경건도 없고, 안정도 없습니다.
말 한마디 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아니 왜 이혼했데? 아니 왜 자살했데? 왜 저렇게 산대? 왜 저모양이래?’라고 하며 평가하고 남을 비난하기는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절제하면 생명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남의 생명도 살겠지만, 나의 생명이 살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심판대 위에 올려놓은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심판대위에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절망이나 낙심이나 자살이나 이혼이나 분냄이나 이러한 모든 무절제의 요소들을 한 단어로 「쭉정이」 라고 합시다.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나는 어떠한 쭉정이가 나를 유혹해도 절제하며 승리할 것이다.
주님이 나를 위해 피흘려 주셨기 때문에 반드시 쭉정이들을 이길 수 있다.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에게 있는 쭉정이들이 물러갈 지어다. 아멘!
우리 성도님 중 한 분은 한때 잘나가는 회사를 운영하고 개인 자산만 몇 백 억 정도 있었답니다. 그때는 그것이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는 겁니다. 사업을 하면서 투자를 했는데 그만 하루아침에 바닷가의 썰물이 빠지듯이 재산을 잃어 버렸다는 거죠. 그다음 교회에 등록을 하셨다고 합니다. 왜 등록을 하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재물을 빼앗아간 것은 사탄의 역사도 아니고 나를 속이고 빼앗은 사람도 아닌, 하나님께서 가져가신 것’임을 깨달으셨답니다. 그 후로는 예전만큼 살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예전과 돈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지셨답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절제하게 하셨는데, 이제부터는 나 스스로가 절제해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똑같은 일을 하시게 하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가치관이 달라지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절제하고, 자만하지 않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지시면 사탄마귀를 탓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건강을 가져가신 이유를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재물이 없어졌으면 주님이 내 재물을 왜 가져가셨을까 원인을 찾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주님께서 똑같은 일로 나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절제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숙제를 하나 내드리겠습니다. 집에 가시면 밤에 묵상의 시간을 가지시면서 ‘혹시 내가 내 아내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셨던 기억이 나시면, ‘혹시 내 남편에게 하지 말아야 했던 말’을 한 것이 기억나시면 서로 꼭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내가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나 행동을 하셨던 적이 있다면 부끄럽지만 자녀들에게 고백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이 끝나면 반드시 안아주십시오.